타투 역사의 큰 한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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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투 역사의 큰 한 걸음을 기인한 사람과 사건 사고는 100년 이상 이어지고 있다.

무채색 타투(블랙워크, 블랙앤그레이 등)는 요즘도 많은 사람들에게 선택되고 사랑받는 주제다.

이러한 블랙잉크를 주제로한 타투는 미국의 형벌제도에서 기인한다. 본래 멕시코 출신의 재소자들이 새기던 타투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가?

단색 계열의 타투 스타일은 꽤나 매력적이 요소를 띄고있다.

이러한 스타일은 미국 사회에서 소외감을 느꼈던 ‘멕시코 이민자’들에게 긍지의 표식이 되었고 강한 소속감을 느끼게 해주는 타투였다.

결과적으로 빈민 지역에 거주했던 젊은 멕시코계 미국인들이 거부감없이 검정과 회색계열의 타투를 수용했고 수감자들의 타투와 비슷한 비밀스러운 메시지들이 담긴 정교한 디자인 새겼다고 한다.

선원 군대

애국심, 자유의 사징

   타투는 제 1차 세계 대전의 발발. 제 2차 세계 대전의 종식까지 그 사이 서양에서 몇 세기 동안 선원이나 군인의 전유물이 되었고 주로 애국심과 자유의 상징으로 활용되었다.

 

서커스

서커스 공연단

   해외의 서커스 공연단은 온 몸에 타투를 잔뜩 새긴 채 도시와 지방 곳곳을 돌며 관객들을 매료시키며 큰 이목을 끌었었다.

‘타투를 잔뜩 새긴 채’.

의도하지 않았던 일부가 20세기 초중반 신체 예술을 대중화시키는데 한 몫했다. 당시 순회공연을 함께하는 상주 타투이스트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고객들에게 타투 시술을 해주며 미국과 유럽 전역의 사람들은 인생에서 처음으로 타투를 접할 수 있었고, 수요는 계속해서 증가했다.

 

암흑기

타투의 암흑기(1940년대 말 ~ 1960년대)

   1940년대 후반 신체 예술의 명성은 바닥까지 떨어진다.

1940년대 말부터 1960년대까지 타투는 암흑기에 달한다. 폭력배, 폭주족, 갱스터 등 불량한 조직과 크루들이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며 사회의 도덕성을 뒤흔들고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다.

당시 주요 타투이스트들은 암암리에 활동하며 타투 혁명을 위한 기반을 다졌다. 또한 사회에서의 소외와 편입되지 않는다고 느낀 사람들은 ‘저항 정신’을 표출하는 강력한 방식으로 새롭게 타투를 수용했다.

암흑기는 현재 한국의 타투 시장과 비슷한 점을 띄고 있다. 옛 야쿠자, 조직폭력배들로 시작한 좋지 않은 인식은 현재까지도 영향을 받는다.

과거에 발이 묶여 성장하지 못하는 셈이다. 연예인, 인플루언서, 셀럽들이 하는 타투는 예술로 보지만 일반인들의 몸에 있는 타투를 보고는 미간을 구기는 모순되는 반응도 보인다.

그들은 타투라는 예술을 좋아하는 소비자일 뿐이다.

또한 타투이스트는 ‘타투 아티스트‘일 뿐이다. 한국에선 불법이기에 불법으로 칭하지만 절대 불법적인 예술을 하는 것이 아니다. 표현이 자유가되고 표현이 누군가에겐 꿈이된다.

예전과 달리 한국의 타투시장은 사회의 겉표면에 많이 올라왔다. 하지만 적대감과 과거 역사에 발이 묶여 한 나라의 문화발전을 방해하는 규제와 법은 여전하다.

규제와 법의 완화는 현재 가장 중요한 필수요소다. 타투 역사의 작지만 큰 한걸음이 될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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