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스키아 : 죽지 않은 검은 피카소로 불리며 전체 이름은 장미셸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 그는 키스 해링과 같이 거리예술의틀을 구축한 1세대 그래피티 아티스트다.
1960년 12월 22일 생으로 미국 뉴욕 주 뉴욕 시 브루클린에서 태어나 1988년 8월 12일 향년 27세의 나이에 헤로인 과다복용으로 미국 뉴욕에서 세상을 떠났다.


공식적인 활동은 1978년부터 1988년까지 예술 업계에서 10년이라는 짧은 기간동안 그가 이룬 업적은 가히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낙서와 인종주의, 흑인영웅, 해부학, 만화, 죽음 등의 주제를 다루며 충격적인 작품을 남긴 바스키아는 팝아트 계열의 천재적인 자유구상화가로 지하철과 같은 공공장소에 지저분한 낙서를 예술 차원으로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현 세대 그래피티 라이터들을 넘어 문신, 현대미술까지 침범하여 많은 이들이 영향을 받고 있는 전설적인 아티스트다.

그는 ‘포스트 그래피티(Post Graffiti)‘ 전시회에서 《무제-붉은 남자 untitled-Red Man》(1981)를 선보이며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포스트그래피티에는 “그래피티 작가를 권위주의적 통제에 대한 표현의 자유를 위한 투쟁에 연결”한 ‘고딕 미래주의’ 철학을 수용한 퀸즈 출신의 반이탈리아 혼혈 예술가인 Rammellzee의 작품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그는 뉴욕 브루클린 파크 슬로프에서 아이티 출신의 회계사인 아버지 제라르 바스키아(Gerard Basquiat)와 패션디자이너인 푸에르토리코 혈통의 어머니 마틸드 안드라데스(Matilde Andrades) 사이의 중산계층에서 태어났다. 그 또한 어릴 적 인종 차별을 받은 경험이 있다. 그가 7세이 던 무렵 부모의 이혼으로 방황을 시작하며 우울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1980년대 브레이크 댄스, 레게, 펑크족의 출현, 힙합 등 흑인 문화의 영향을 받아 그래피티를 그렸다. 이후 슬럼가에 사는 10대들이 그린 낙서에 담긴 특유의 반항 의식을 예술로 표현하게 된 것이다.
1980년 그의 인생을 바꿔준 인물인 앤디 워홀을 만나기 이전 맨해튼 이스트 빌리지의 미술대학을 다니던 이들과 유흥가에서 어울렸고 그 시기에 키스 해링을 만나게 된다. 앤디 워홀을 만나게 된 건 키스 해링과의 만남 이후다.
앤디 워홀은 그의 천재성을 단번에 알아보며 자신의 스토리인 ‘팩토리’에 자유로운 출입을 허가했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워홀) 자신의 재력과 더불어 타고난 마케팅 실력을 바탕으로 그를 화가로서 몸값을 끌어올리는 데 성공하고 바스키아는 워홀 덕분에 화가로서의 입지가 탄탄해지며 그의 유명세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상승하며 단번에 성공까지 이르게 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위치와 유명세로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되며 각종 소문들과 갈등이 발발하며 워홀과의 공동 전시 실패까지 발생해 그 계기로 워홀과 교류를 하지 않게 된다. 이후 바스키아는 헤로인 중독으로 인한 사망소식과 함께 그의 생을 마감하게 된다.
생전 앤디 워홀 덕분에 성공한 바스키아 라는 수식어가 있었지만 그는 독학으로 그림과 드로잉 및 구성에 타고난 재능이 있었다. 그가 주로 사용한 재료는 캔버스, 종이, 린넨, 종이 콜라주, 크레용 전사를 넘어 문에 아크릴과 유성 페인트 및 스프레이 페인트를 포함하여 다양한 제품을 사용하며 작품을 창조해냈다.

바스키아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대중적으로 알려져있는 왕관이며 특정 아티스트와 흑인들에 대한 존중에서 시작된 작품은 훗날 왕관만을 그려 넣는 것 외에 점차 본인의 서명으로 사용했을 정도로 소유권과 권위를 나타내는 도장, 태그와 다름 없는 부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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